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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반열에 다가가는 박찬욱

우리는 한국의 작가주의 감독 박찬욱과 마주 앉아 사랑과 고문의 교차점,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독창적 주제, 그리고 최신작 <어쩔수가없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현대 영화의 지형 위에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비전가로 자리매김 해왔다. 그러나 유산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한국 영화감독 박찬욱의 어깨 위에 무겁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우리는 거장의 반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6년 박찬욱은 <Film Comment> 와의 인터뷰에서 세대마다 소수의 감독만이 위대한 수준에 이른다고 말한 바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 나루세 미키오, 김기영 같은 이들박찬욱에게는 영화사의 거인들이자 영웅들이다. 많은 시네필들은 <올드보이>(2003), <아가씨>(2016)로 잘 알려진 한국의 거장을 그 반열에 올려놓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박찬욱 자신은 의문을 품는다. “작품마다 그들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그가 런던 스튜디오 창밖의 흐릿하고 햇빛이 어른거리는 묘지를 응시하며 고백한다. (그 풍경은 마치 히치콕의 <현기증>(1958) 에서 바로 잘라온 듯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제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좌절 하기도 합니다.”

현장에서 그는 ‘감독님’이라 불린다. 배우와 스태프 모두가 경외심을 담아 부르는 호칭이다. 그에게 잘 어울린다. 직접 마주하면 그는 무엇을 화면에 담고 무엇을 배제할지 반평생을 고민해 온 사람답게 자신감 있게 말한다. 런던에서 진행된 이번 인터뷰 내내날카로운 블랙코미디 <어쩔수가없다>를 홍보하러 온 자리에서그는 차분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다가 가끔 부드럽게 웃음을 터뜨리거나 질문을 곱씹으며 오래 묵상하는 듯한 낮은 흥얼거림을 흘리기도 했다

박찬욱의 작품은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서 왔다. 그의 영화 세계는 흔히 폭력과 코미디의 독특한 결합으로만 단순화되곤 하지만, 이는 오해에 가깝다. 물론 그의 영화에는 어둡고도 코믹한 폭력의 순간들이 가득하다. <올드보이>에서는 한 남성이 녹슨 망치로 이가 뽑히고,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납치된 뒤 납치범들에 의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최신작에서는 생명이 다한 몸이 가공육처럼 차갑게 다뤄져 교외의 뒷마당에 묻힌다. 그러나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박찬욱의 영화 속 고통은 모두 치밀한 설계의 일부라는 점이다. 충격적인 이미지이긴 하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다단순히 피에 굶주린 것도 아니다.

박찬욱의 집요한 집착죄와 분노, 그리고 복수 속에는 사랑에 대한 매혹이 자리한다. 그것은 자기 만족적이고 감미로운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피 흘리는 사랑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 초자연적인 스릴러 <박쥐>(2009)와 영어권 <스토커>(2013)에서부터 시대극

<아가씨>(2016), 그리고 피 끓는 누아르 <헤어질 결심>(2022)에 이르기까지 결국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맴돈다. 뒤틀렸지만 피할 수 없는 인간적인 사랑, 가족적이거나 로맨틱한 사랑(<올드보이>의 경우스포주의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난다). “관객들이 제 이야기에서 그 부분을 놓쳐서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박찬욱은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어떻게 사랑과 폭력을 영화 속에서 이토록 매끄럽게 조화시키는지 묻자, 그는 자신을 피실험체에게 극한의 고문을 가하는 광기의 과학자에 비유했다. 이는 복수 3부작으로 악명 높고도 매혹적인 세계를 선보인 감독다운 대답이었다.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을 담을 수 있는 지를 발견하기 위해 온갖 뒤틀린 시각과 고통스러운 관점을 적용합니다.” 그가 설명했다. “마치 실험실에서 피실험체를 극한의 상태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거의 고문에 가까운 방식이지요. 그런 상황을 통해 피실험체에 대해 더 깊은 무언가가 드러납니다. 제 영화 속 뒤틀린 로맨스에도 같은 효과를 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성의 선과 악이 드러납니다.”

박찬욱의 담담한 태도는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에게 딸이 준 영향에 대해 물었다. 2006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딸을 위해 만들고 헌정했다.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SF 로맨스인 그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기발하고 따뜻한 색채를 띤다. “젊은 페미니스트로 성장한 딸은 제 작업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줍니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딸의 승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시나리오 작성을 마무리합니다.” 이어 그의 획기적인 초기 작품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 아내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아요. 아내는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관객 반응에 크게 충격을 받았어요. 아내가 그립지 않기 때문에 저도 그립지 않습니다.”

초기 작품 <공동경비구역 JSA>(2000)와 복수 3부작으로 한국 뉴웨이브의 기준을 아찔할 만큼 높여놓은 박찬욱은, 최신작 <어쩔수가없다>에서 62세의 나이에 자신의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의 흡혈적 효과를 휘몰아치는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이 작품은 박찬욱의 전작 출연 배우 이병헌(공동경비구역 JSA )을 유만수 역에 캐스팅했다. 유만수는 성실한 가장으로, 제지 공장에서 해고된 뒤 필사적으로 새로운 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자들을 살해하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한국 남성성을 탐구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박찬욱은 말한다. “자신들이 만든 구조 속에 갇혔을 때 남자들이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는 8월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뒤 뜨거운 찬사를 받았고, 이후 한국 박스오피스를 장악했다. 박찬욱은 베니스를 수상 없이 떠났고, 친구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2019년 아카데미를 지배한 것처럼 아직 아카데미상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봉준호의 표현대로 지역시상식들이 수여하는 트로피 추구를 훨씬 넘어서, 급변하는 영화 환경 속에서도 시간을 견뎌내며 새로운 관객에게 다가가고 있다. 2024년 그는 두 번째 영어권 TV 시리즈 <동조자>를 공개했는데, 이를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자랑스러운 작업이라 최근에 밝힌 바 있다. 한편 <아가씨>는 새로운 세대의 시네필들에게 그의 세계를 소개했다. 이 시대극 스릴러이자 레즈비언 로맨스는 현대 퀴어 클래식으로 칭송받으며 현재 영화 데이터 사이트 레터박스의 공식 Top 250 내러티브 영화에서 67위를 차지하고 있다—(<올드보이>는 근소한 차이로 87위로 뒤를 잇고 있다.)

그럼에도 박찬욱은 위대한 감독들과 대화하는 예술가로서의 겸손함과 부담감을 안고 자신의 경력에 대해 말한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1997)<어쩔수가없다>로 각색하기 시작했을 때, 박찬욱은 이 작품이 자신의 첫 걸작이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지금 그와 마주 앉아 그가 그것을 이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감독님께서 <어쩔수가없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오래전이었습니다. 그때 만들었다면 지금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박찬욱: 모든 것이 달랐을 겁니다. 영어권 영화였을 거고 미국을 배경으로 했을 겁니다. 배우들도 달랐을 거예요. 어떤 작품이 그전에 있었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졌을 거예요. 그게 저한테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박쥐> 다음에 나왔다면 결과물이 달라졌을 겁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헤어질 결심> 다음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반대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헤어질 결심>이 더 시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더 산문적이고;

<헤어질 결심>이 더 미니멀했다면 이 영화는 더 풍성하며; <헤어질 결심>이 더 여성스러웠었다면 이 영화는 더 남성적입니다. 과거에 <어쩔수가없다>를 만들었다면, 그 앞에 어떤 영화가 있었느냐에 따라 영화의 모습이 달라졌을 겁니다. 

세대마다 소수의 영화감독만이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박찬욱: 저는 여전히 과거의 위대한 감독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작품마다 그들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좌절 하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된 영화와 관련된 기억은 무엇인가요?

박찬욱: 영화  <애수>(1940)입니다. 어머니가 극장에서 보고 좋아했던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TV에서 할 때 다시 보고 싶다 해서 같이 보았고, 제게 로맨스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제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이소룡 영화



박찬욱: 저는 여전히 과거의 위대한 감독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작품마다 그들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좌절 하기도 합니다.

<정무문>(1972)입니다.. 인물의 분노, 그리고 복수심이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감독님의 영화에 담긴 폭력성에 대한 말은 항상 많았지만 저는 늘 감독님이 그려온 로맨스 묘사에도 똑같이 끌렸습니다. 사랑은 감독님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도처에 있습니다. 조금은 뒤틀려 있지만 나름대로 순수합니다. 그런 묘사가 사랑의 본성에 관해 감독님이 가진 어떤 철학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박찬욱: 제 작품에서 로맨틱한 사랑을 일관되게 묘사했다고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관객들이 제 이야기에서 그 부분을 놓쳐서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을 담을 수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온갖 뒤틀린 시각과 고통스러운 관점을 적용합니다. 마치 실험실에서 피실험체를 극한의 상태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극심한 추위나 더위처럼, 거의 고문을 하는 것처럼요. 그런 상황을 통해 피실험체에 대해 더 깊은 무언가가

드러납니다. 제 영화 속 뒤틀린 로맨스에도 같은 효과를 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성의 선과 악이 드러납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를 어린 딸을 위해 만들었죠. 딸이 훌쩍 자란 지금, 그녀는 아버지의 작품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박찬욱: 제 딸은 현재 컬러리스트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화 산업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첫걸음을 떼고 있어서 영화와 제작 과정에 대해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젊은 페미니스트로서 딸은 제 작품 속 여성들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여성 관객들이 불편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제게 많은 조언을 해줍니다. 우리는 그 부분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합니다. 딸의 승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시나리오 작성을 마무리합니다.

<어쩔수가없다>에서 꽤 불안한 미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감독님께 ‘내일’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요?

박찬욱: 제 딸이 지금 31살인데, 제 딸의 미래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 이제껏 살 만큼

살았는데, 앞으로 딸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늘 걱정됩니다. 기후 변화, 인공지능 같은 기술의 발전, 전쟁, 핵무기이런 모든 것들이 제 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렵습니다.

<어쩔수가없다> 속에는 전통과 현대 사이의 밀고 당기는 긴장이 있습니다. 남성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옛 방식을 고수하지요. 이것은 특히 한국의 남성성에서 두드러진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박찬욱: 한국의 남성성을 탐구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스스로 만든 구조에 갇혀 얼마나 남자들이 초라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지요. 한국 사회에는 서구보다 더 강한 가부장적 흔적이 남아 있어서,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반드시 져야 하는 책임이나 지켜야 하는 행동 방식이 있습니다.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수치스러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만수와 범모의 실직은, 그들의 직업이 남성으로서의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직업을 잃으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지요.

이번 작품에서 이병헌의 코믹한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습니다.

박찬욱: 중요한 점은, 이병헌이 결코 웃음을 노리고 연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캐릭터가 코믹하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인물의 진짜 감정에 집중했지요. 그 진실을 좇는 태도 덕분에 그의 연기가 더욱 생생하고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함께 만든 지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두 분의 창작적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박찬욱: JSA 이후 저는 늘 이병헌에게 “언제 늙을 거냐”고 물었습니다.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했는데, 그는 여전히 너무 젊어 보이고 피부도 탄탄하며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는 멋진

미소를 지었지요. 너무 건강해 보여서 제가 그동안 만든 영화 속 인물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를 다시 배우로 캐스팅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그의 별명 중 하나가 이빨부자인데, 웃을 때 보통 사람보다 치아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지요. 물론 말도 안 되는 별명이지만요.

<복수는 나의 것>이 개봉했을 때,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조금은 지쳐 있기를 바랐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박찬욱: 저는 여전히 그 철학을 믿습니다. 영화가 저를 지친 상태로 몰아넣을 때 오히려 큰 만족을 느낍니다. 영화 내내 긴장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꼭 공포영화 여야만 그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조차 강렬한 긴장감을 줄 수 있습니다. 영화가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흥미롭다면 관객은 온전히 집중해야 하고, 결국 만족스러운 피로감 속에 남게 됩니다. 그것이 잘 만들어진 영화의 특징입니다.

<달은…해가 꾸는 꿈>(1992)부터 <어쩔수가없다>까지 감독님의 모든 영화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생각이 있나요?.

박찬욱: 제 모든 영화의 일관성은 죄에서 비롯된 감정을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제 영화는 큰 죄를 저지른 인물들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고통과 혼란에 집중합니다. 제 인물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윤리적 딜레마를 던지고 싶습니다.

2019년에 <어쩔수가없다>를 당신의 걸작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뤘다고 생각합니까?

박찬욱: 이 영화를 오랫동안 준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걸작을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코폴라의 말을 빌리자면, 걸작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그 욕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작 과정에서 일부러 다가올 걸작의 위대함으로 관객을 놀라게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낍니다.